HOME > 트래블 매거진 > 테마 스토리

테마 스토리

러시아 여행자 클럽, 준스키 이야기 - 공연이 끝난 후 편

유럽 · 러시아 · 모스크바

문화/명소

여행전문가 칼럼

2015.08.06 조회수2364


russia

 

<러시아, 또다른 유럽을 만나다> 저자 정준오

 
글쓴이 소개
 
낯선 도시의 거리에서 마주하는 낯선 공기의 촉감이 좋다.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여행 같은 일상을 꿈꾸며 사는 소박한 여행바라기. 서른에 다시 찾아온 학창시절을 맞아, 꿈같은 방학마다 틈만 나면 배낭을 꾸렸다. 본격적으로 여행 맛에 들린 건, 회사를 그만두고 떠났던 여행 덕분. 중국-네팔-인도-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에서 보낸 93일, 히말라야 트레킹, 워크캠프, 스노보딩, 산티아고 순례가 들어있던 이 여행은 아무리 생각해도 인생 하이라이트 중 하나였고, 그래서 <행복하다면, 그렇게 해>라는 책도 냈다.

 

russia

 

그저 설레었을 뿐인데, 두 번째 책 <러시아, 또 다른 유럽을 만나다>도 쓰게 됐다. 처음 러시아에서 만났던 친구들과 함께 다시 러시아로 떠났던 이야기. 그 설렘은 책에 이어 대한항공 광고까지, 여행에서 여행으로 계속 이어졌다. 여행은 정말이지 내가 내게 줄 수 있는 진짜 선물인 것 같다.

 

 

공연이 끝난 후 - 러시아 극장 순례기 

 

russia 


 
누구나 ‘발레’ 하면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떠올릴 것이다. 사실 발레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서유럽에서 융성했지만, 후발 주자였던 러시아는 대쪽 같은 지원 정책과 귀족들의 관심으로 세계 최고의 발레단을 탄생시키며 꽃을 피웠다. 발레의 수준은 곧 ‘군무群舞’의 수준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칼군무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러시아 발레!


러시아 발레를 대표하는 볼쇼이 발레단과 마린스키 발레단은 세계5대 발레단에서 당당히 두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각각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전용 극장을 가지고 있는데, 볼쇼이 극장과 마린스키 극장 모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다.

 

russia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페라 극장 중 하나,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은 붉은 광장에서 나와 조금만 걸으면 볼 수 있고, ‘춤’ 백화점을 이웃에 둔 웅장한 예술 궁전이다. ‘볼쇼이’는 러시아 말로 ‘큰’. 그야말로 커다란 궁전 같은 공간에서 매일 세계 최고 수준의 오페라, 발레 공연이 펼쳐진다. 홈페이지에서 예매는 필수!

 

 

모스크바 서커스

 

처음에는 볼쇼이 극장에서 열리는 공연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극장 앞에 가보니 공연 표는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았었다. 우리는 암표를 구해 보느니, 러시아 발레 못지않게 유명하다는 모스크바 서커스를 보러 가기로 했다. ‘우니베르시떼뜨 역’ 근처에 있는 러시아 국립 서커스 극장으로 향했다. 무려 4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극장.


가까스로 공연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고 보니, 서커스장다운 특이한 외관에 3,400석 규모의 커다란 원형 공연장이 우리를 압도했다. 어마어마한 공연장을 가득 메운 이들은 여행자보다는 아이들과 함께 온 러시아 가족들이 대다수였다. 모스크바에서 서커스는 한번 볼 만하다는 말에 귀 얇은 우리들은 별 고민 없이 보기로 했지만, 막상 처음 공연장에 들어섰을 때만 해도 다 큰 남자들끼리 서커스를 보러 왔다는 게 조금은 징그러웠던 게 사실. 서른 초중반, 청춘의 중년쯤 되는 우리는 오페라나 발레 공연을 보았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후회도 들었다. 하지만 공연이 시작되자 그런 생각은 곧 씻은 듯이 사라져버렸다.

 

볼쇼이나 마린스키의 제1공연단은 여름에는 해외로 순회공연을 가고 없기 때문에, 최고의 공연을 보려면 여름보다는 겨울에 보러 가는편이 좋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우리가 본 여름 공연에는 허술한 구석이 없지 않았다. 원형의 공연장을 열 맞추어 돌아야 할 백마들이 말을 듣지 않고 헤매기도 했다. 하지만 권투하는 캥거루, 묘기 부리는 원숭이, 뒹구는 곰 등 능청스러운 여러 동물들이 우리를 동심으로 이끈 덕분에 그런 실수마저도 유쾌하게 느껴졌다.

 

russia 


서커스 사이사이에 발레리나와 발레리노가 등장해 발레를 보지 못한 아쉬움을 덜어주기도 했다. 어른이 되어 서커스를 보고 느끼는 감상이란, 서커스단에서 열연하는 백색 무희들을 보며 그들의 어린 시절을 상상해보는 일이었다. 발레 학원에서 친구들과 함께 땀 흘렸는데, 조금 더 잘하는 친구들은 볼쇼이나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엘리트 코스를 걷고 있을 터. ‘나는 내가 사랑하는 발레를 다른 차원에서 승화시키자.’ 이런 결의로 서커스단의 문을 두드렸을지 모를 그들의 지난 시절을 상상했다. 물론 우리가 본 것도 ‘국립 모스크바 서커스단’이어서 더욱 심한 경쟁을 이겨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상상하고 보니 왠지 저들의 좌절과 역경 극복의 드라마 때문에 청승맞게 콧등이 시큰거렸다. 한 살 한 살 먹어갈수록 눈물이 많아진다는 건 이런 건가.

 

 

러시아 발레 강박증

 

모스크바에서 볼쇼이 극장을 앞에 두고 들어가보지도 못한 우리, 그래도 별로 아쉽지는 않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마린스키 극장이 있거든. 숙소도 그래서 마린스키 극장 옆으로 잡았다. 마린스키 극장은 반드시 가야 한다는 사명감(?) 비슷한 것이 꿈틀댔던 때문. 매일 발레와 오페라, 오케스트라 공연 등이 쉴 새 없이 열리는 문화 예술 중심 구역 앞에서 우리는 설레고 있었다. 우리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렀던 기간에 마린스키 제2극장에서는 발레리노들의 군무가 인상적이라는 〈스파르타쿠스〉 공연이 두 차례 열릴 예정이었다.


상트에서 처음 아침을 맞은 우리는 일어나자마자 부랴부랴 마린스키 극장 홈페이지에서 예매를 시도했다. 발코니에 가장 싼 자리가 몇 군데 있었지만, 몇 차례 알 수 없는 결제 오류가 일어나는 바람에 그만 자리를 놓치고 말았다. 허망하게 마우스 버튼만 까딱까딱하다가 작전 회의를 했다.

“내일 티켓은 좀 남아 있는데, 내일 거라도 지금 예매할까?”
“공연 직전에 파는 암표를 구하면 훨씬 싼값에 좋은 자리를 살 수도 있지 않겠어? 그냥 이따가 직접 가서 사보자!”


하지만 그건 큰 실수였다. 저녁 공연 시간에 맞추어 마린스키 극장에 갔더니,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매표소 앞에 줄지어 서 있었다. 슬쩍 보니 이제 티켓은 값이 꽤 비싼 자리밖에 없었다. 우리는 매표소 앞을 서성이며 암표상을 기다렸지만, 암표상인 듯한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russia 


남은 표도 비싼 표밖에 없던 탓에, 우리는 다음 날 다시 와서 암표상을 찾기로 하고 먹을 거리를 찾았다. 마린스키 극장 근처에는 국립 림스키코르사코프 음악원을 볼 수 있다. 1862년 설립되어 차이콥스키,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등 그 이름만으로도 역사가 되는 음악가들을 배출한 곳이다. 그런데 우리에겐 그것보다 당장 주변에 먹을 게 없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넵스키 대로에서 버스를 타고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곳인데 이럴 수가 있나. 근사한 레스토랑과 펍은 몇 군데 있었지만, 가난한 배낭여행자의 더듬이는 무의식적으로 그곳으로 향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때 할머니가 손주들에게 고쟁이에서 사탕을 꺼내 주듯, 설뱀이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견과류 봉지를 꺼내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우리는 땅콩과 호두를 사이좋게 씹으며 터벅터벅 다시 넵스키 대로로 돌아갔다.

 

russia 
1860년에 지어진 마린스키 극장(왼쪽)과 2013년에 새로 개관한 마린스키 제2극장(오른쪽)은 작은 운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다음 날 저녁, 우리는 다시 마린스키 극장을 찾았다. 어제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넵스키 대로에서 미리 배도 채우고, 세계 최고의 발레 공연을 감상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찾아왔다. 그런데 아뿔싸! 이제 싼 표는커녕 비싼 표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정말 여기까지 와서 발레를 보지 못하고 돌아가야 하는 걸까?


“난 발레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는데도 진짜 감동적이더라.”


볼쇼이 극장에서 〈백조의 호수〉를 보았는데 정말 좋았다는 친구의 말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다. 우리는 더 이상 가만히 서서 암표상을 기다려서는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우리가 직접 암표상을 찾아 나섰다.


“저 아저씨, 암표상 같은데?”
한 남자가 늘어진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손에는 ‘일수 가방’처럼 보이는 검은 가방을 든 채 수상하게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도저히 저런 차림으로 공연을 보러 왔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차림이 그보다 덜하면 덜했지 더 낫지는 않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계속 사방으로 눈을 흘기며 탐색만 이어가다가 시간만 흘려보내고 말았고, 공연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일수 가방을 든 남자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 결국, 일수 가방이, 지금 유행하는 남자 패션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돌아가기로 했다. 저녁 8시가 넘었는데도 날은 또 왜 이리 훤하기만 한지. 그래서 더 짙은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미리미리 예매를 해뒀어야 했다. 아니, 좀 비싼 표라도 살 수 있을 때 샀어야 했다.


“너무 아쉬워하지 마. 너 어차피 한국에서도 발레 안 보잖아.”
냉정한 택형이 일침을 가한다. 그 말이 맞다. 하지만 러시아 발레는 발레를 잘 몰라도 격한 감동을 준다지 않는가. 어쩌면 진짜 예술은 그런 걸지도 모른다. 모르는 이에게는 낯선 충격을, 아는 이에게는 더욱 풍성한 감동을 주는 것. 여유를 부리고 요행을 바라다가 극장 내부조차 구경하지 못한 우리. 시도하는 편이 하지 않는 편보다 후회가 훨씬 덜하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시도는 했으나 무식했던 탓에 두고두고 후회할 일을 만들고 말았다.

 

russia 


러시아까지 와서 발레를 못 보다니! 뭐, 훗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꼭 다시 와야 할 이유, 그리움 하나 만들어놓고 왔으니 다행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러시아인들은 전쟁 통에도 이런 공연을 감상했다고 한다. 물론 여유 있는 귀족들이 그랬겠지만. 언젠가 다시 이 나라를 찾아서, 귀족 놀이 하고 말리라!

 

 

▶ 다음편 계속

 

▶ 이전편 보기

당신 여행스타일에 맞는 천만 가지 여행상상 KALMASTER travel.koreanair.com

0byte / 800byte

※ 게시판 성격과 맞지 않는 글은 통보 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댓글 3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