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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와 영국 런던 - 책 한권과 떠나는 두 손 가벼운 여행 8편

유럽 · 영국 · 런던

문화/명소

여행전문가 칼럼

2019.08.20 조회수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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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사 문화예술부 편집 담당

 

어렸을 때부터 『사회과 부도』를 펼쳐 두고, 북에서 남으로, 동에서 서로 모든 강과 산, 도시와 평야를 하나하나 짚어 가며 그 이름을 외우는 걸 좋아했다. 과거에는 ‘기억술사’라는 사람들이 존재해서, 오늘날 ‘외장 하드’처럼 온갖 중요한 정보들은 암기하고 있었단다. 그들은 자기 머릿속에 ‘기억의 집’을 짓고, 그 무수히 많은 방 안에다가 일련의 정보들을 특별한 법칙에 따라 배치했다고 한다. 물론 나는 그런 수준의 사람은 아니지만, 어쨌든 암기하는 데에 일종의 즐거움을 느끼곤 했다.

 

여행을 기억하는 데에 있어서도, 내 묘한 취향과 부족한 재능을 십분 발휘하곤 했는데,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사진 같은 문명의 이기를 통해 여러 섬세한 도움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참고 자료’를 들춰 볼 때에도 먼저 기억의 유혹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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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 관한 기억이 극히 희미하다는 데에 가끔 놀라곤 한다. 사실 별스럽고 치명적인 일은 아니지만, 온갖 것을 기억하기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점이 다소 낯설다. 엄청난 꿈을 꾸었을 때,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불현듯이 눈이 떠지면, 방금까지 분명 생생했던 장면들이 송두리째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도 누구나 한 번쯤, 어쩌면 매번 겪어 봤을 일이리라. 무서운 꿈이었다면 칠흑 같은 두려움만이, 행복한 꿈이었다면 달콤한 메아리만이 감지될 뿐, 자세한 정황이나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거대한 아방궁이 순식간에 모래바람으로 변해 버린 듯하다. 내게는 런던에 관한 기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어떤 느낌만이, 일부 보잘것없는 순간만이 메모처럼 떠돌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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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비행으로 도착한 히드로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도심으로 이동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피터 팬」에서 보았던 그 광경이, 틀림없이 지상으로 내달리는 와중에도,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내 눈앞에 펼쳐졌다. 그러고는 행갈이를 하듯, 기억이 어긋난다. 적당한 줄거리를 찾아볼 수 없는 이 기억 속에서, 가장 큰 뼈대를 하나 더듬어 보자면, 그건 분명 대영 박물관이다. 나는 이 유명한 박물관에 갔다. 런던에서 그걸 제외하면 무엇이 남겠는가? 물론 거대한 시계탑도 있고,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다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타워 브리지, 셰익스피어의 극장과 여왕, 왕궁, 버버리 또 무엇이 있기는 할 터다. 하지만 수집과 약탈, 그 사이를 오가며 오랜 세월 켜켜이 만들어진 이 무지막지한 전시장에 비할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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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이 대영 박물관에 관한 기억도 희미하다. 나는 이집트 전시관을 돌아봤고, 오직 그곳에만 머물렀던 것 같다. 수많은 미라들이 안치되어 있었다. 그들 뜻대로 영생을 얻었지만, 이런 식으로 영겁의 세월 내내 구경거리가 되어야 하다니, 과연 무엇이 진정한 안식일지 확신할 수 없었다. 요즘처럼 자기 스스로를 전시하는 데에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고대 이집트에도 많았다면, 이렇듯 전 세계를 향해 죽음을 과시하는 것이야말로 행복한 결말이 아닐까, 하고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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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박물관을 벗어나 좁은 골목을 따라 오래도록 걸었던 것 같다. 날씨는 의외로 쾌청했고, 셰익스피어가 연인에게 바쳤던 전형적인 여름날이었던 것 같다. 나는 런던의 여름이 너무도 상쾌해서 놀랐다. 대륙 동쪽에 위치한 우리나라의 고온 다습한 여름에 비하자면, 이곳의 날씨는 정말 천국 같았다. 물론 가 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그렇게 찾아 들어간 이름 모를 식당에서, 악명 높은 영국 요리를 즐겼다. 피시 앤드 칩스. 튀기면 무엇이든 맛있기에, 나는 적잖이 만족했던 듯하다. 런던에 관한 기억은 여기까지다. 마치 양초의 마지막 심지가 다 타 버려서 그을음조차 쥐어짜 낼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것처럼, 내 여행은 거기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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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즉 기억 없는 것을 기억해 낼 때마다 나는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를 생각해 내곤 한다. 어느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깡그리 사라져 버린 자신의 ‘기억’을 찾아 유럽 전역을 배회하는 내용의 작품이다. 쉬이 예상할 수 있겠지만 그런 시도는 대체로 성공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성공 여부는 사실상 부차적일 뿐이다. 고고학자가 늘 ‘과거’라는 수수께끼에 사로잡혀 있듯이, 우리도 그저 파괴된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이어 붙여 볼 뿐이다. 가끔씩 그래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오곤 한다.

기억을 보수하려는 시도 자체가, 종종 다시 여행을 떠나라는 스스로의 명령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기억들은 좋았던 것, 불분명한 것, 찬란한 순간을 되찾으라고 부추긴다. 한번 다녀온 장소를 다시 여행하는 것은, 어쩌면 박물관을 둘러보는 일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망각으로 잠겨 드는 모자이크 조각을 새롭게 조립하고, 배치하면서 우리는 ‘과거 이상의 것’을 찾아낼지도 모른다. 가령 지금, 혹은 미래 같은 것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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