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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도시 상하이, 내 마음에 들어와 추억이 되다. - 5편

아시아 · 중국 · 상하이

문화/명소

여행전문가 칼럼

2016.03.23 조회수9320


shanghai

 

<상하이에서 큐레이터로 살아가기> 저자  최란아


 

상하이에 깃들인 한국

 

상하이의 첫 얼굴은 내게 참 어려웠다. 나는 그 상하이에게 어떻게 대응을 해야할지 막막했다. 나를 상하이 사람으로 생각해주는 인심은 고마웠지만, 언어도 문화도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 그런 환대는 오히려 부작용만 일으켰다.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나는 상하이 사람이 아니라고, 여기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고, 급급히 나 자신을 상하이로부터 분리시키기 바빴다. 그만큼 나에게 상하이는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도전적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물을 찾게 되었다.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하던 한 주말이었다. 그런데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물 문 앞에 다다르자, 눈물이 핑 돌았다. 이런 무슨 주책이… 여기가 바로 그, 교과서에서 배웠던 ‘상하이 임시정부’란 말인가? 상하이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도시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는 걸 느끼는 순간이었다. 우리 할아버지도 독립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셨다고 하지 않았던가.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가슴에 품고 살아오신 열 형제의 막내였던 아버지, 식구는 안 돌보고 독립운동 한다며 나가서는 집에 들어오지도 않던 할아버지 때문에, 아버진 오히려 식구만 알고 지내는 다정다감한 분이 되었다.

 

화이하이루 전철역에서 내려 마당루를 따라 걸어 내려간다. 왼쪽으로 신티엔디가 보이고 (당시엔 공사가 진행중이었음), 그 신티엔디를 지나서 더 내려가니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집이 나왔다. 팻말도 작게 걸려 있고, 들어가는 입구도 소박하다. 눈여겨 살피지 않으면 자칫 지나치기 쉬운 장소, 주변의 다른 집들과 많이 다르지 않은 집이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방을 둘러보며 상하이 임시정부에 대한 기록들을 읽어본다. 사진들이 많다. 사진들도 쳐다본다. 혹시나 싶어 할아버지의 이름을 찾아보지만, 그의 이름은 없다. 그래도 김구 선생님을 따라 상하이까지 가서 독립운동을 하셨을 그의 얼굴은 사진들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 할아버지의 얼굴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이름으로 확인을 할 뿐, 그의 얼굴은 알아볼 수가 없다. 그 시대 부잣집 아들이었던, 그래서 일찌감치 일본으로 첼로 유학도 다녀오셨다던, 나의 할아버지의 흔적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신티엔디 

신티엔디

 

프랑스 조계 

프랑스 조계

 

 

상하이 임시정부는 3.1운동 이후 일본 통치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하여 설립된 곳이다. 당시 상하이는 교통이 편리하고 쑨원이 이끄는 광동정부의 지원도 받을 수 있는 곳이었으며, 또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의 조계가 도시 속의 작은 독립 국가들처럼 형성되어 있어서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독립지사들은 프랑스 조계에 살면서 활동을 펼쳐나갔는데, 그들이 세운 것이 상하이 임시정부다.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구성하고 각도 대의원 30명이 모여서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하였으며, 1919년 4월 13일 한성임시정부와 통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한 것이다. 1919년 상하이를 시작으로, 이들은 항조우(杭州, 1932), 쩐장(鎭江, 1935), 창사(長沙, 1937), 광조우(廣州, 1938), 류조우(柳州, 1938), 치장(1939), 총칭(重慶, 1940) 등지로 청사를 옮기며 광복운동을 전개했다.

 

임시정부 

 

항일독립전쟁은 의열투쟁과 독립군단체지원·광복군창설 등의 군사활동으로 이루어졌는데, 의열투쟁의 대표적인 본보기는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였다. 그 결과 한국독립에 대한 여론을 대외적으로 널리 알렸으며, 아울러 임시정부는 일제의 보복을 피해 여러 곳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중국이 공산국이 된 이후 한국은 중국과 단절되었다가, 1993년 수교를 맺으면서 다시 중국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한국인들이 다시 중국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상하이에도 일과 공부 등의 목적으로 많은 한국인들이 들어왔다.

 

 

현재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국인 수는 1만 여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많은 수의 한국인이 롱바이라 부르는 지역에 살고 있는데(지하철, 롱바이 신춘역), 홍췐루, 즈텅루 등의 거리에 가면 한글을 많이 볼 수 있다. 한국인 상점, 음식점, 커피숍들이 온통 거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한국 음식도 한국에 있는 그대로의 맛으로 전문 요리를 즐길 수 있고, 한국식 중국 음식도 먹을 수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모두 한국사람들이어서, 마치 한국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최근에는 한국인이 오픈한 아이들 실내 놀이시설도 생겨, 아이들을 키우는 한국 엄마들에게는 희소식이 되었다.

 

원래 한국인이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형성한 이 한국인 촌이 그런데 일대 혁신을 맞는 계기가 있었는데, 얼마전 <별에서 온 그대>가 인기를 끈 이후였다. 드라마 속에 나온 ‘치맥’을 먹기 위해 중국인들이 한인촌에 몰려온 것이다. 물론 치맥 뿐만 아니라 한국의 맛을 맛보기 위해 한인촌을 찾은 것이다. 한국 레스토랑들은 사람들이 너무많아 기다려서 밥을 먹어야 했고, 그래서 한국인들은 오히려 뒷전으로 밀려나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주연배우 김수현은 중국의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5억원의 출연료를 받았고, 전용기까지 제공받은데다 중국 측에선 보안요원 600명 정도를 풀었다고 한다. 시진핑 최근측 중국 권력서열 6위인 왕치산은 ‘한국 드라마가 우리보다 앞서 있다고 느낀다’고 했다고 하고, 워싱턴 포스트에서는 <별에서 온 그대>의 중국 내 인기를 언급하면서 한국 드라마가 중국의 모범이 될까, 하는 기사가 실렸다고 한다. 사실 한국의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는 네덜란드의 한 교수도 칭찬을 했을 정도이다. 한국의 드라마는 그냥 심심풀이용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교육적, 혹은 인간적인 측면의 교훈이 숨어 있다며, 한국의 드라마가 수준이 높다고 인정했다. 여러 아이돌 그룹이나 ‘강남 스타일’의 싸이 역시 중국에 한류를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는데, 한국의 드라마나 K-Pop은 나오는 대로 히트를 치는 분위기다.

 

사실 지금처럼 한국인이어서 자랑스러웠던 때가 없다. 한국인이라고 하면 너무나 반갑게 인사를 하기도 하고, 드라마 등에서 배운 한국어로 더듬더듬 한국말을 해보려는 친구들도 있고, 한국문화원에서 본격적으로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도 있다. 중국에서 한류의 인기로 인해 우리가 받는 관심, 그냥 지나칠 것이 아니라, 이를 더욱 활용하여 우리의 언어와 문화를 잘 알려야겠다는 생각이다. 많은 한국인이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살고 있는 이웃의 도시 상하이, 그리고 한류의 힘을 발판으로 한국의 것들을 체험해 보고자 한국으로 들어오는 중국인들의 물결. 지금 우리에겐, 중국인들과 어떻게 잘 어우러져 살아야 하는가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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